유배길
추자유배길 도보코스
절해고도인 추자면이 유배지로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후기이다. 추자면으로 유배 온 최초의 인물은 송길유(宋吉儒)이다. 송길유는 고려 중기 대장군으로 경상도수로방호별감이 되어 야별초를 거느리고 주(州)·현(縣)을 돌아다니면서 몽고병에 대비하여 백성들을 섬으로 피신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때 영(令)을 쫓지 않는 자가 있으면 때려죽이고, 백성들이 재물에 애착심이 있어 고향을 떠나기를 어려워할까 염려하여 그 집과 재물을 불태우며 토지와 재물을 약탈하였다. 1258년(고려 고종 45) 이 사실이 안찰사 송언상에게 적발되어 도병마사에게 보고되고 다시 집권자 최의에게 알려져 추자도에 유배오게 된다. 그 후 고려시대에는 더 이상의 유배인은 나타나지 않다가 조선이 건국된 이후 태조 때 도평의사사에서 이색 등의 귀양처로 추자면이 유배지로 거론되면서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추자면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의복과 음식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유배지로 삼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면 전라도 도서지역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서남해역의 크고 작은 섬들이 유배지로 활용되지 시작하였고, 추자도의 경우도 유배자가 줄을 잇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추자면이 조선시대 유배지로 사용한 빈도는 전체 지역 가운데 15위, 섬 지역 가운데는 제주도·거제도·흑산도·진도·남해에 이어서 6위에 해당될 정도로 많았다. 절도 유배지 가운데 추자도는 제주도·흑산도와 더불어 중죄인이 보내지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추자면에 유배 온 사람들의 죄목을 보면, 정조 즉위 반대, 역모, 반역, 연좌, 국정모독죄, 살해 공모, 탐학 등 비교적 죄질이 나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사형을 감면 받아 온자가 있을 정도로 추자도에는 중죄인의 집합소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이전의 유배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추자도에 살고 있는 성씨를 통해 유배에 의한 입도가 많음을 알 수 있다. 각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성관록」에서 밝히고 있는 입도조에 대한 기록을 통해 밀양 박씨, 김해 김씨, 남양 홍씨, 추계 추씨, 원주 원씨, 해주 최씨, 인동 장씨, 강릉 유씨, 화계 변씨, 김해 배씨, 홍양 천씨, 해남 윤씨, 창원 황씨, 진주 하씨, 청주 김씨, 함안 조씨, 동복 오씨 등이 유배에 의해 추자도에 들어온 사람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